비가 오면, 마음이 깊어진다.
비가 온다.
유리창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
우산 위를 톡톡 두드리는 소리,
그 너머로 흐릿하게 물든 세상의 윤곽.
이상하게도 비가 오는 날엔 마음이 잠잠해진다.
도시의 소음도, 바쁜 걸음도,
잠시 멈춘 듯 조용해진다.
빗소리는 배경음악처럼 잔잔하게 스며들고,
그 안에서 오래된 기억 하나가 조심스레 고개를 든다.
잊은 줄 알았던 감정, 묻어두었던 장면들이
슬그머니 마음을 두드린다.
사람은 왜 비를 보면 감상적이 될까.
햇살 좋은 날엔 스쳐 지나가던 풍경도,
비 오는 날엔 이유 없이 마음에 남는다.
그리움도, 아쉬움도,
말 한마디 못 했던 후회도
이 빗속에 녹아 다시 내게로 온다.
어릴 적 나는 비를 좋아했다.
장화를 신고 물웅덩이를 뛰어다니며
비를 맞는 것도 즐거웠다.
우산을 일부러 접고 흠뻑 젖으며 달렸던 길,
엄마가 문 앞에서 수건을 들고 기다리던 그 장면.
그 시절의 비는 자유였고, 놀이였고,
내가 가장 맑았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비는 점점 번거로운 것이 되었다.
젖은 바지 끝, 축축한 신발,
출근길의 교통체증,
그리고 짜증 섞인 사람들의 표정.
나는 비를 피하고, 미워하고,
가능하면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 문득,
아무 일 없는 휴일에 비가 내렸다.
그날 나는 우산을 들고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빗소리만이 귀에 닿고,
모든 것이 느리게 흐르던 그 시간.
그 빗속에서 누군가 조용히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잠깐 멈춰도 괜찮아.”
그 한마디가 마음을 건드렸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나를 바라보는 시간.
비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날도 그냥 흘러갔을 것이다.
감정도, 기억도, 나 자신도.
비는 그렇게
내가 미처 들여다보지 못한 마음을
조용히 꺼내주었다.
비는 단순한 날씨가 아니다.
그건 삶을 잠시 느리게 만드는 장치다.
감정을 맑게 하고,
생각을 깊게 만든다.
사람들은 비를 피해 뛰어가지만,
나는 이제 가끔 멈춰 선다.
흠뻑 젖어도 괜찮다고,
마음이 젖는 게 더 중요하다고 느낀다.
비는 젖는 것이 아니라,
깊어지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이별도, 고백도,
가장 내밀한 이야기조차
비 오는 날 꺼내놓는다.
비는 묻지 않는다.
그저 들어준다.
그리고 조용히 씻어낸다.
오늘도 창밖엔 비가 내린다.
김이 오르는 커피잔을 들고,
나는 생각에 잠긴다.
비가 아니었다면
내가 나를 돌아보는 일은
더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비는 나에게 ‘멈춤’을 가르쳐주었다.
그 멈춤 속에서야
나는 나에게 진심으로 묻는다.
“정말 괜찮니?”
“천천히 가도 되는 거야.”
그 대답을 찾기 위해
나는 오늘도
이 빗속에 잠시 머물러본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참 고맙다.